연말이 되었지만, 바이러스의 창궐과 추가 방역 조치로 인해 모임 갖기가 어려워졌다. 모이기 어려워진 만큼, 간신히 두세 명이라도 만나게 되면 그 정은 각별하기 마련이다. 각자 품에 넣어온 술을 나누어 마시고, 질세라 그 시절의 참소리들과 헛소리들을 교환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무리 즐거운 만남이었어도 결국 어쩐지 슬프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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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슬프고 쓸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 세상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그 즐거웠던 모임도 영속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한 만남도 시간 속에서 풍화될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어 그 즐거웠던 순간을 박제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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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박힌 그 순간만은 어쩌면 (사진이 보존되는 한) 영속할지도 모른다. 나는 단순히 셔터를 누른 것이 아니라, 셔터 누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 것이다. ... 사진이 없던 시절, 만남을 남기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남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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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람들이 글을 써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다. 훗날 누군가 자기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일이다. 불멸을 원하지 않아도, 상상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지 않아도, 글을 쓸 이유는 있다. 작가 이윤주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글을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엄습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쓸 필요가 있다고. 쓰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인해 달구어졌던 편도체는 식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진정될 수 있다고.
인류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환경은 꾸준히 망가지고 있는데, 불멸을 꿈꾸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연말을 맞아 나는 고생대에 번성하다가 지금은 멸종한 삼엽충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장차 멸종할 존재로서 이미 멸종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상상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것이 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 김영민, "못난 글은 못난 글대로 누군가의 타산지석이 된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25/R77ZPTBNZ5ARFCUT4OETN32N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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