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4

연말이 되었지만, 바이러스의 창궐과 추가 방역 조치로 인해 모임 갖기가 어려워졌다. 모이기 어려워진 만큼, 간신히 두세 명이라도 만나게 되면 그 정은 각별하기 마련이다. 각자 품에 넣어온 술을 나누어 마시고, 질세라 그 시절의 참소리들과 헛소리들을 교환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무리 즐거운 만남이었어도 결국 어쩐지 슬프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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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슬프고 쓸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 세상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그 즐거웠던 모임도 영속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한 만남도 시간 속에서 풍화될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어 그 즐거웠던 순간을 박제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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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박힌 그 순간만은 어쩌면 (사진이 보존되는 한) 영속할지도 모른다. 나는 단순히 셔터를 누른 것이 아니라, 셔터 누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 것이다. ... 사진이 없던 시절, 만남을 남기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남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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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람들이 글을 써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다. 훗날 누군가 자기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일이다. 불멸을 원하지 않아도, 상상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지 않아도, 글을 쓸 이유는 있다. 작가 이윤주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글을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엄습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쓸 필요가 있다고. 쓰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인해 달구어졌던 편도체는 식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쓰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진정될 수 있다고.

인류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환경은 꾸준히 망가지고 있는데, 불멸을 꿈꾸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연말을 맞아 나는 고생대에 번성하다가 지금은 멸종한 삼엽충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장차 멸종할 존재로서 이미 멸종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상상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것이 시간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 김영민, "못난 글은 못난 글대로 누군가의 타산지석이 된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25/R77ZPTBNZ5ARFCUT4OETN32N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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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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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7

We calculate odds, of course...
But even the most unlikely outcomes must always, eventually, occur.
Hope is a mathematical certainty.

- Heaven's V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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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C'est impossible, dit la Fierté  불가능해, 자존심이 말했다.
C'est risqué, dit l'Expérience  위험해, 경험이 말했다.
C'est sans issue, dit la Raison  해결책이 없어, 이성이 말했다.
Essayons, murmure le Cœur.    해보자, 심장이 속삭였다.

- Wiliam Arthur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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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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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2

화자에게 그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속으로 무심코 저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도 놀라버렸을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한다. 내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라는 말을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말로 조용히 바꿔보았을 한 사람 말이다.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 의해 사랑이 발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정이 아닌가? 사랑과 동정을 혼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우리는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요즘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그냥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디선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시의 '너'는 산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그래서 이 시의 '나' 역시도 이렇게 시를 쓰면서 내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로 읽었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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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2

그렇게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이
평범은커녕 아예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이던 이성으로부터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분신인 듯 잘 맞던 친구로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소름 돋던 노래가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저 짝사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삶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 따위가 시들어 버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삶이 치명적일 정도로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순간 또한 있다

우리는 여지껏 느꼈던 평생 간직하고 싶던 그 감정은 무시한채
영원할 것 같이 아름답고 순수하던 감정이 다 타버려 날아가는 순간에만 매달려 절망에 빠지곤 한다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고
지나간 모든 것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잊혀질 모든 만사를 얹고
왜 굳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며 사냐는게 아니다

어차피 잊혀질테니, 절망하지 말라는 거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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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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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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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5

"다른 모든 철학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서도 윤리학의 역사를 꽉 채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것은 그들이 대답하고자 했던 질문이 정확하게 어떤 질문인지를 고찰하는 대신에, 무턱대고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자 했었다는 것이다. 만약 철학자들이 무턱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들이 묻고자 하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 탐구한다고 해도 이런 실책의 원천이 얼마나 제거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분석과 구분의 작업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시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는데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분석과 구분에 대한 단호한 시도는 그 성공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시도에 전념한다면, 철학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가 사라질 것이다. 하여튼 철학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도를 생략한 결과,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답변하고자 하는 그 질문에 긍정적 답변이나 부정적 답변 모두 틀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묻는 질문이 단 하나의 질문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에는 긍정적 답변이 가능할 수 있지만, 다른 것에는 부정적 답변이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선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선을 정의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적 속성과 동일시해야 한다. 선을 쾌락이라는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여 '선은 쾌락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선은 쾌락인가?'라는 물음은 '선은 선인가?'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동어반복으로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은 쾌락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하지 않다. 쾌락 대신에 어떠한 자연적 속성을 대입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므로, 선을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모든 정의는 오류이다. 선을 형이상학적 송성과 동일시하는 정의들은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를 추론한다. 즉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선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이끌어 낸다. 그런데 당위는 당위로부터만 도출되기 때문에 사실로부터 당위를 끌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선을 형이상학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정의들은 모두 오류이다."

- G.E.무어, "윤리학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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