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철학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서도 윤리학의 역사를 꽉 채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것은 그들이 대답하고자 했던 질문이 정확하게 어떤 질문인지를 고찰하는 대신에, 무턱대고 그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자 했었다는 것이다. 만약 철학자들이 무턱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들이 묻고자 하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 탐구한다고 해도 이런 실책의 원천이 얼마나 제거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분석과 구분의 작업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시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는데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분석과 구분에 대한 단호한 시도는 그 성공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시도에 전념한다면, 철학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가 사라질 것이다. 하여튼 철학자들은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도를 생략한 결과,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답변하고자 하는 그 질문에 긍정적 답변이나 부정적 답변 모두 틀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묻는 질문이 단 하나의 질문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에는 긍정적 답변이 가능할 수 있지만, 다른 것에는 부정적 답변이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선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선을 정의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적 속성과 동일시해야 한다. 선을 쾌락이라는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여 '선은 쾌락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선은 쾌락인가?'라는 물음은 '선은 선인가?'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동어반복으로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은 쾌락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하지 않다. 쾌락 대신에 어떠한 자연적 속성을 대입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므로, 선을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모든 정의는 오류이다. 선을 형이상학적 송성과 동일시하는 정의들은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를 추론한다. 즉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선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이끌어 낸다. 그런데 당위는 당위로부터만 도출되기 때문에 사실로부터 당위를 끌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선을 형이상학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정의들은 모두 오류이다."
- G.E.무어, "윤리학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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